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는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하지만, 일할 때는 더 중요하다. 회사에서는 이 것이 곧 평판이자 업무 실력이 되기도 하고, 고객을 얼마나 배려할 수 있느냐가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현재의 커리어와 전혀 무관한 건축학 전공이 나름 이 일에 도움이 되는 이유도 같다. 어떤 학문보다 사람 신체 치수와 행동반경, 어떤 공간을 편하게 느끼는지, 어떤 공간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행동하게 할 것인지를 밤을 새워서 고민하고 과제를 한다. 대부분의 시간은 고민만 하다가 답을 얻지 못하고 부리나케 과제를 마무리하고 교수님께 크리틱으로 깨지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그 것을 고민하는 시간,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라는 감각이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저 사람은 이 데이터를 왜 보는지, 이 데이터를 본 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이 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를 알고 그들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가장 최적의 디자인을, 사용자가 가장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결과물을 제안하는 것.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 친화적인 태도를 망각하는 순간도 많다. 아무래도 기술적인 우위(?)에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너무하다 싶은 정도의 기초적인 질문들을 반복해서 받을 때가 그렇다. 좋은 기획자이자 유능한 직장인은 이런 상황에서도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며, 그런 불편함을 사용자 중심에서 해결 방법을 모색하겠지만, 아직 나는 친절함의 레벨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오늘 퇴근하면서 회사 앞 분식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든 생각이다. 갑자기 왜 이런 재미없는 생각이 들었냐고? 핸드폰 식권앱으로 결재하고 구두로 주문해서 번호표가 없는 나를, 키오스크 주문한 고객처럼 나도 모르는 204번이라 부르는 무심함에 기분이 묘하게 안 좋았기 때문이다. 맞다. 쫌생이 진상 고객이 투덜대는 중이다.

   이번 주는 역대급 회의의 주간이다. 간단한 교육 지원부터, 내가 2시간씩 이틀을 강의해야 하는 교육과 네 번의 외부 업체와의 제품 검토 미팅, 회사 팀장 교육, 타 부서와 업무 검토 미팅 2번 그리고 팀원과의 원온원. 여기까지가 오늘이 오기 전 확정된 일정들이었고, 오늘 오후에 거래처와의 미팅, 그리고 내일 부서 임원분과의 진행 상황 체크 미팅이 급하게 잡혔다. 팀장을 달고서 이렇게 연달아 회의인 주는 처음이다. 

  극 I인 나는 이렇게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 앞에서는 상당히 긴장한다. 막상 상황이 닥치면 또 싹싹한 척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잘 모르기도 하지만,  여러 사람들 무리에 있을 때 엄청 긴장을 많이 하고 두려워 한다. 이건 회사에 들어오기 전, 교회 리더를 할 때부터 그랬다. 이런 증상(?)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오래전부터였다. 꼬맹이 때는 나서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던 것 같아서, 태생이 그런 것 같진 않기도 한데 말이다. 불안하고 두렵고 떨리는 기분은, 회사를 다니면서 회의를 아무리 많이해도 심해지면 심해졌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없어지진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주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다(사실 잠도 거의 못 자고 설쳤다).

  피곤한 한 주의 시작인 탓일까. 일진도 그렇게 좋진 않았다. 오후에 만난 기존 거래처에서는 더 이상 거래가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고, 작년부터 1차, 2차에 거쳐서 에너지를 쏟아부은 프로젝트는 '헛수고였습니다.'라는 의미의 정중한 표현을 들었다. 직원 사용 니즈에 맞지 않은 화면으로 인해 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며, 프로젝트 발의부서 직원이 조심스레 의견을 묻는 전화였다. 그리고 아침에는 우리 부서 요청 좀 빨리 처리할 수 없냐는 뉘앙스의 채팅도 받았다.


그래도 커리어 라인을 잘 탔는데! 뭔가 니가 그 일을 하기에 딱 맞는 듯한 이미지가 확실히 있어. 우리 회사에서는.

  오후에 타 부서 동료와 커피 한 잔 하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친구가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그래도 위로가 되었다. 극 T인 나는 이런 위로에 크게 감동받는 스타일은 아니지만(친구야, 미안. 내가 T라서 이 게 솔직한 심정이야) 그래도 이 말 하나만 기억으로 오늘을 덮으련다. 내일은 내일의 내가 견뎌낼 것이다.

  트레바리에서 책을 읽으며 버킷리스트를 적는 과정에서 블로그 글쓰기를 다시 시작한다.

  2019년, 처음 이 블로그를 시작할 때부터 꾸준히 썼더라면 벌써 5년 치의 글이 있었을 테고, 그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엄청난 자산이 되었을 것인데 말이다. 나 역시도 6년 만에 블로그에 들어와서 IT부서에 처음 왔을 때의 나의 글을 읽어봤다. 그때는 뭔가 설렘이 가득했던 분위기가 글에서도 느껴진다. 내가 뭔가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도구를 얻은 것만 같은 헛된 뽕(?)이 들어간 기분.

  그 뒤 5년을 보낸 지금, 조금은 어이없게도 나는 IT부서의 팀장이 되었고, 더 이상 그런 헛된 기대로 신나 할 어린 나이가 아니게 되었다. 나를 팀장으로 승진시켜준 회사에는 고마운 마음이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납득이 잘 안 된다. 내가 과연 팀장급인가?

  5년의 IT본부 소속, 전사 BI책임 부서에서 일하면서 SQL Server 쿼리 약간, 리눅스의 명령어 약간, 국내 업체에서 만든 ETL 프로그램 약간, 태블로 기술 약간을 배웠다. 이 정도만 아는데 팀장이 된 것에 대해 부끄럽기도 하고, 다른 개발직군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다. 개발자 중에는 IT부서에서 일한 지 10년 가까이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 몇몇 친구들은

"팀장이 무슨 실무를 알아야하는 건 아니지. 그냥 결정해 주고, 책임져주고, 힘들면 격려해 주고 그럼 되지. 일은 실무자가 하는 거지 팀장이 다 알 필요 없잖아."

라고 한다. 근데 막상 나는 기술을 모르니, 문제를 들고 오는 팀원들에게 더 좋은 판단과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 어렵기도 하고,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책임이라면 그 횟수를 줄일 수 있는 기술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디테일한 실무는 몰라도 큰 그림은 알아야 판단은 해주는데, 현재 사용하는 태블로 서버 관리 문제만 해도 사건이 생기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가 많다(참고로 우리 회사는 유지관리 계약을 웬만하면 하지 않는다).

혹시 내가 쓴 고민에 공감이 되는가? 이런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가 쓰는 이 글들로, 이런 막막한 싸움(?)을 하는 이가 혼자가 아님을, 소소한 위안이 되길 바란다. 대한민국 어딘가에는 IT인이라고 말하기 낯간지러운 사람도 팀장까지 달고서 불안과 씨름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