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부서로 옮기고 가장 먼저 겪은 혼선은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들이었다.

"현업 부서에서 어쩌구저쩌구...."

현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듣는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현재의 업무'라는 의미거나 '현재 업무에 종사한다'는 의미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현업이라는 말이 대화 중에 나오면 혼란스러웠다. 알고보니, IT 부서가 아니라 해당 IT 시스템과 연관되어 업무들을 처리하는 타 부서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그러고보니, 작년 ERP 개선 프로젝트를 하면서 회의할 때도 현업부서라는 말이 중간에 나왔던 것 같기도 했다.

왜 IT부서 사람들은 'IT와 현업(?)'이라는 구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우리 회사만의 이슈인지, 다른 제조기업에서 종사하는 IT직군이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가지 짐작가는 부분은 있다. 현재의 우리 회사는 재무/회계, 인사, IT, 시각/VMD 영역이 그룹 전체로 통합되어 있다. 각 브랜드는 철저하게 영업,기획, 마케팅에 집중되어 있는데, 브랜드 각각 비즈니스 모델이 서로 다른데다가 지향하는 브랜드 이미지도 달라서 시스템과 관련된 불만이 나올 때가 있다. 최초에 시스템을 만든 브랜드의 세팅에 나머지 브랜드가 억지로 끼워맞춰서 운영을 하다보니 피치못하게 편법과 임기응변이 난무하는 업무 프로세스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만을 이야기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통합하는 것이 각각 제멋대로 흩어져서 운영되다가 통합하는 것보단 쉬울 것 같기도 해서 머리로만 이해한 회사의 논리를 납득시키려고 애쓰곤 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IT 부서가 비즈니스를 더 잘 할 수 있게 돕는다는 느낌보다는 전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려고만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아마존과 넷플릭스처럼 IT 기술 자체가 비즈니스의 도구인 시대에 IT부서를 비즈니스 부서와 구분짓는다는 건 다소 위험한 발상같기도 하다.

어쩌면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된 피해의식이 '현업' 이라는 단어 하나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짜 비즈니스와 멀어진 채 IT부서라는 우물 안에 갖히긴 싫다. IT 부서원이 아니라, IT를 다룰 수 있는 팀원으로 비즈니스의 영역을 넓힌다고 스스로를 열어놓고 싶다.

인사 발표가 나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어쩌다가....."

뉘앙스가 참 묘했다. 완전 생판 다른 일을 하게 되었는데 괜찮겠느냐의 걱정 어린 마음도 있는 것 같았고, 회사에서 일 잘 못하고 이직률 높기로 유명한 팀에 가게 되었는데 고생 좀 하겠네 라는 비아냥 같은 뉘앙스도 있었다. 그리고 나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기회인지 좌천인지.

IT 직군이라니...

변화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은 아래와 같은 생각이었다.

  1. 이전 부서에서 일하면서도 IT에 관심은 있었다.  : 요즘 초등학생은 코딩을 우리 때 피아노 학원만큼이나 너나 할 것 없이 배운다는데, 10년, 15년만 지나도 그렇게 코딩이 자연스러운 애들이 일하겠다고 몰려올테고, 그때 그 아이들은 나를 어떻게 느낄까를 생각해보니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PPT나 엑셀을 잘 못 다뤄서 헤매는 어르신 세대의 상사와 실무를 하게 되면 느끼는 답답함 이상의 내 감정을 그들이 나에게서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조급한 마음에 회사 온라인 교육 프로그램으로 파이선 강의도 하나 들었다. 그리고 IT서비스의 기획일은 어떻게 하는지도 알고 싶어서 패스트 캠퍼스의 서비스기획 스쿨 2기도 수강했다. 이렇게 비 IT인으로서 사이드로 개인적으로 돈들이고 시간 들여서 별도로 배우는 것보다는 일하면서 배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것은 맞으니까 좋은 기회인 것 같았다.

  2. 지금 일 하는 부서에서 일의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는 짓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 원래는 제품기획이 나의 업무였는데, 의도치 않게 제품기획 일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 있었다. 대신 누구도 하기 귀찮아하는 관리에 가까운 일들이 나에게 넘어오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그런 일들을 뒤처리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기획일에서 멀어진 건 사내 정치에서 밀린 측면도 있고, 한 편으로는 임원이 지시하거나 타 브랜드에서 필요하다면서 벌려놓은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출시까지 의견을 조율하는 업무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말이 좋아 기획자지 결국에는 프로젝트 PM이 롤이었던 터라, 나 스스로도 큰 애정을 못 느끼고 있기도 했다. 혹시 그때의 팀장이, 현재는 미약한 우리 팀의 정치적인 파워를 인정하지만 훗날이라도 기획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하는 욕심이 있어서, 제품의 매출 추이를 보면서 어떤 제품의 매출이 줄고 있는지, 시장에서는 어떤 제품이 관심을 받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큰 관점에서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면 버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에는 당시의 팀장은 인사/재경 출신이어서 비즈니스나 기획, 마케팅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고, 업무를 처리하는 방식도 철저하게 상사의 지시에만 집중하는 타입이었다. 팀/사업부의 비전은 그분에게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전략파트라는 말만 그럴싸한 파트에서 혼자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나눠놓은 팀장은 다른 팀으로 부서를 옮겼고, 새로운 팀장은 말로는 제품기획의 최고참으로 선배 역할을 하라고만 했지, 실제로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무엇인가를 알려주거나 도와주거나 할 수 있는 기회는 주지 않았다. 몇 번의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바뀌는 바는 없었던 걸로 봐서 아마도 내가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생각으로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싫었던 것 같다. 그게 본인을 위협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치적인 파탄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날보다는 잘 몰라서 헤매더라도 뭐라도 명확히 나의 역할이 있는 팀에 가는 것이 좋을 것은 분명했다. 

  3. 아예 쌩판 모르는 걸 배워서 해야하는 건 또 아니었다. : 관리 업무를 맡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관리 툴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러면서 회사에서 가르쳐준 툴이 태블로(Tableau)였는데, 그게 귀찮은 많은 일들을 줄여주었다. 처음 써보는 것이고, 사내에서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혼자 헤매듯이 배워가면서 자료를 만들었는데, 그 프로그램을 많은 사람들이 잘 쓸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새로운 팀에서의 첫 번째 롤이었으므로 정말 멘 땅에 헤딩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반면에 부정적인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1. 이제와서 IT를 한다는 건 과거를 전부 휴지통에 넣는 커리어가 되는 건 아닐까? : 건축을 공부해서 설계를 때려치우고, 일반 기업에 건축과 관련된 업무로 입사했지만 2년 만에 제품 기획/개발 PM 일을 하게 됐고, 사업부의 사업계획과 재무성과를 관리했다. 그동안의 커리어도 그다지 방향성 있는 느낌은 아니지만, IT라 함은 전혀 다른 영역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회사 내에 서비스기획 직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개발자가 두리뭉실한 프로젝트 개발 계획을 세우는 것이 IT기획(?)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인 회사에서 내가 어떻게 기획업무의 커리어를 IT 직군으로 옮겨서도 가져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렇다고 경력 9년 차에 병아리 개발자... 도 아닌 대학교 컴공과 신입생 수준으로 일을 시작한다고 생각하기에도 너무 암울했다. 10년에 가까운 커리어는 나의 연봉만 높이고 능력은 하나도 없는 무능한 경력자로 만드는 건 아닌지 두려웠다.

  2. 내가 그렇게 욕하던 부서에 소속이 된다. : 작년 ERP 개편하는 프로젝트를 회사에서 진행하면서 우리 회사의 IT 부서의 일하는 수준에 말도 안되는 실망감을 느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개선하고 싶었던 점을 여러 현업 부서에서 취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반영된 것은 거의 없었고, 과거의 호환성이 떨어지는 언어로 개발된 시스템을 웹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 프로젝트 성과의 90% 이상이었다. 처음에 프로젝트를 설명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한 시스템 개선을 해주겠다고 하길래 이번 기회에 정리안 된 제품코드를 정비하고자 약 3개월에 걸쳐 모든 제품의 제품코드를 분석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개편된 시스템 오픈 일주일 전, 다른 연계된 시스템에서 그 작업을 받아줄 수 없어서 적용이 안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통보, 그게 다 였다. 대책은 없었다. 우리 팀장과 함께 가서 담당 팀장에게 대놓고 불만을 얘기하고 대안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해당 프로젝트 이후에 어떻게 개선을 해주겠다는 말 한마디, 혹은 개선 계획을 세워서 추후 미팅을 하자는 말 한마디 없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정말 회사가 한심했다. 우리 회사가 일하는 수준이 이 정도인 것이었다. 그들이 인간적으로 나쁜, 무책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랐고, 그 팀은 그 상황을 처리해줄 여력이 없었다. 그런 부서에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우울했다. 내가 느낀 한심함을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는 게 싫었다. 그리고 나로 인해 조직이 달라지게 하겠다는 의욕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 의욕은 너무 과한 욕심이라는 것을 이미 제품기획일을 하면서 알고 있었다. 조직을 변화시킬 만큼 실력 있는 개발자도 아닐뿐더러,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직을 바꾸는 망상은 현실을 이기지 못하면 스스로를 망칠 뿐이었다.

근데 사실 회사 인사발표는 말 그대로 인사명령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IT의 세계에 빠르게 적응하고 실력을 키우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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